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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유발 하라리 - 호모 데우스

 

 

  한동안은 책을 읽으면 이렇게 서평을 남기기도 했었지만, 사는 곳이 변함에 따라 도시에서 농촌으로 나섬에 따라 시야가 넓어져 책을 들지 않았다. 물론, 서점에 들러서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는지 살펴보기는 했었지만, 오랜만에 인문학 책을 집어 들었다.

 

  내 주변도 그렇고 세계도 그렇고 전례없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변하더라도 거기서 거기라는 진부한 반응도 들려오지만, 그렇다기에는 변하는 모습을 시시각각으로 볼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다. 분명 몇 해 전에는 21세기는 정보의 바다에서 넘쳐나는 정보의 양이 예견되었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 같다.

 

  수없이 많은 정보가 있고, 그 진위여부를 믿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해류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에 큰 방향성을 읽어갈 뿐, 깊이에 대해서는 다분히 경계하게 되었다. 깊게 사색을 하면 그것은 나의 생각과 기준이 반영되게 되고 큰 물길을 편승하거나, 물길에서 다른 길을 만들어내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기도 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만 하다.

 

  이러한 생각들이 모아져 서평을 쓰는 것에 대해 망설였지만, 다년간의 사색을 한번은 구체화해둘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서평을 쓰기로 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읽기에 따라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인문학 책은 당장 지금 현재를 바꾸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해 고찰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책 역시, 저자의 목표는 세상을 보는 근거있는 시각을 제공하는데 있다. 그리고 모든 인문학 책이 그렇듯 앞으로 나아가는 비젼을 제시하기 전에는 역사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철학, 종교,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알 수 없는 미지의 것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지식'은 논리적이고 증명이 가능하며 반복해서 재현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라고 볼 수 있다. '인식'은 수없이 많이 쏟아지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정보를 바라보는 태도 혹은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과 '인식'이라는 두 영역이 과거에는 혼재하고 나눌 수 없는 영역으로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과학의 영역에서 더이상 나눌 수 없다고 여기던 원자도 '인식'의 영역일뿐 '지식'의 영역에서는 이미 많은 종류의 소단위로 나뉘어졌다. 종교의 영역에서도 하늘이 내리는 빛과 물이 별자리나 전지자의 능력이라고 '인식'의 영역에서 받아들이지만, '지식'의 영역에서는 그 원리를 알고 있다.

 

  단순히 여기서부터 의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식'이라는 영역을 버리고 '지식'이라는 영역만 취하면 되는게 아닐까? 현재 우리가 '지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도 어느 순간 '인식'의 영역이 되고 '지식'은 다른 이야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식'은 하찮은 것일까? '인식'을 완전히 버릴 수 있는가? 버릴 수 없다면 어째서 그러한가?

 

  책에서는 지금까지의 역사가 해온 방법대로 진행한다면, '인식'은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를 데이터화 할 수 있고, 그것을 분석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있다면, 그것은 재현가능성이 생기고 이는 '지식'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물은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에서부터 결과물이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솔직한 심정은 부정이었다.

  마음속 깊이 어딘가에는 '알고리즘'으로 정리되어 '지식'으로 정리되지 못하는 기본적인 영역이 있지 않을까? 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아쉽게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치만, '알고리즘'은 귀납적 추론의 결과로 생기는 방향성을 규격화 한 것이다. 이 귀납적 추론을 벗어나는 행위가 있다면, 그것이 '알고리즘'으로 규격화 되기 전 까지의 시간은 '인식'의 영역 안에 둘 수 있지 않을까?

'인식'의 영역안에 있다면, 거기서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단편적인 예를 바로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가상화폐'였다.

 

  솔직히 처음 '가상화폐'를 접하였을 때, 이미 현금이 아닌 통장의 숫자만 인터넷을통해 이동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크게 느끼지 못하였다. 숫자는 만국 공통이었지만, 단위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 화폐로 말미암아 단위를 통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것의 가치는 높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재의 가상화폐는 내가 생각했던 가치로 귀결되고 안정적인 요소들을 찾아 가고 있다. 그러나 초기에 이 개념이 나왔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누군가는 이것을 화폐로 치부하고 가치를 바로 한정지었고, 누군가는 이것을 투자처로 보고 투자를 시작했다. '인식'의 차이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것은 가상화폐라는 개념이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던 5년간의 차이가 만들었던 사건이다.

 

  사실, 이 것은 대단한 발견이 아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인식'이 '지식'으로 흡수되는 시간차에 의해서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 시기, 산업혁명시기, 이념전쟁시기의 흐름이 바로 그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 속도가 몇십년을 단위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 속도를 줄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바로 '인터넷'이라는 문물이라고 보인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에 앉아서 정 반대편에 있는 미국의 영화관의 영화표를 예매할 수있다. 미국의 사건이 바로 한국으로 몇초 안에 전달이 된다. 이러한 작은 시간의 단축이 모여서 몇십년이 고작 몇년의 시간차로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인식'이 '지식'의 세계로 들어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졌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라는 물음으로 정리가 된다. 어떻게 답을 찾아 갈지는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정해질 것 같다.

 

 '인식' 혹은 '지식'의 개념을 바꾸는 것에 집중한다는 방법.

 '시간차'를 늘리는 것에 집중한다는 방법.

 '시간차'보다 더 앞서서 다른 사람들과 차별해서 움직인다는 방법.

  이러한 세계를 무시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

 

  아쉽게도 한 사람의 인생은 시간이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시간차'와 관련된 방식의 접근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시간차'를 늘리는 방법은 존재할까? 오히려 점점더 짧아지기만 할 것 같다. 대전쟁이 발발해서 지금의 산업기술을 이용할 수 없는 시기로 돌아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일부는 그래서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치만, 전쟁은 전세계인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뤄온 경험이 역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것은 '시간차'보다 앞서서 다른 사람들과 차별해서 움직이는 방법 뿐이다. 간단한가?

절대 간단치 않을 것 같다. 다른 사람이라는 기준이 아주 많고, 차별이라는 요소는 저항감을 가지고 있다. 정답은 그 누구도 모른다는 걸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 책을 읽고 나서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한층 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오랜만에 이렇게 글로 정리해야하는 일이 즐거웠다. 심심하다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은 책임에는 분명하다.

 

호모 데우스 + Homo Deus (원서+번역서 패키지)
국내도서
저자 :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 김명주역
출판 : 김영사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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